[브라보 크리에이티브 유럽 S4] #72. 오르세와 오베르, 프랑스 여행 중 고흐를 만나는 길

2018. 12. 27. 00:00Bravo Creative Europe/Stage4. 벨기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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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크리에이티브 유럽 S4] #72. 오르세와 오베르, 프랑스 여행 중 고흐를 만나는 길


프랑스 여행 중 고흐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두군데 있다. 한 곳은 파리시내에 있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다른 한 곳은 고흐의 마지막 생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이다. 오르세와 오베르. 고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고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첫번째 장소,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 센강 서안에 위치한 국립미술관으로서, 1900년 건축가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의 설계로 기차역 내부에 건립되었다. 그래서 미술관 내부의 모습은 거대한 시계를 비롯하여 마치 기차역사 같은 느낌이 든다.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서양 미술 작품 및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나 우리에게 익숙한 고흐(Van Gogh)를 비롯하여 밀레(Millet), 마네(Manet), 모네(Monet), 르누아르(Renoir)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를 풍미한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72, Van Gogh. 오르세 미술관 2층 72구역 반고흐 섹션에는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를 비롯한 그의 작품 십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Deux fillettes / 두 소녀

1890

Oil on canvas

H. 51,2 ; L. 51,0 cm


고흐와 고갱과의 관계가 현대에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고갱은 자신 스스로가 반 고흐의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언급하였으나,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고흐가 고갱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을 품었다 추측한다. 실제 그 둘은 두 달간 함께 지냈으며, 그시기 고흐는 고갱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한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들은 열정적으로 충돌하였고, 지성은 뜨겁게 다투었지만 서로를 담은 초상화속에서 애증에 관계를 느낄 수 있다. 이 그림 속 대상은 윤곽선으로 강하게 구획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고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당시 고흐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던 주제는 현대적인 초상화였다. 이 시기에 이 작품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소재로 삼아 그린 초상화들을 남겼다.










Le docteur Paul Gachet / Dr Paul Gachet / 폴 가셰의 초상화

1890

Oil on canvas

H. 68; W. 57 cm


그림 속 폴 가셰는 정신과 전문의로 동성애 의사였지만, 당시 여러 예술가들을 지지할 만큼 그의 열정은 예술에 향해 있었다. 또한 그는 고흐의 정신적 치료를 위해 힘썼다. 고흐의 동생 테오의 권유로 만난 고흐와 폴 가셰는 고흐가 죽기 전, 두 달간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는 고흐에게 행복을 위한 편안함과 고뇌를 극복 할 수 있는 방안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조언하였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 호의적이었던 가셰박사는 기꺼이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림 속 가셰의 우울한 표정은 아내와 사별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를 투영한다. 고흐는 그것을 우리 시대의 황량함을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림 속 가셰 박사 앞에 놓인 폭스글로브라는 약초는 그가 고흐의 정신병을 치료하는데 쓰였다고 전해진다. 








L'église d'Auvers-sur-Oise, vue du chevet / The Church in Auvers-sur-Oise, View from the Chevet /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1890

Oil on canvas

H. 94; W. 74 cm


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서 힘든 시기를 겪은 후 고흐는 프랑스 외곽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여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곳에서 두 달간 많은 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은 그 시기에 머물렀던 곳의 한 교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13세기 초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고흐의 격렬한 붓질로 재 탄생하였다. 실존하는 이 교회사진은 본 포스팅 밑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Chaumes de Cordeville à Auvers-sur-Oise / Thatched Cottages at Cordeville, Auvers-sur-Oise / 오베르 쉬르 우아즈 코데빌의 초가집

1890

Oil on canvas

H. 73; W. 92 cm


그의 비극적 죽음이 있기 몇 주 전에 그려진 이 그림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파리 북쪽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한 시골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그림의 윤각선에서 보여지는 왜곡과 지붕의 물결무늬, 나선형의 나뭇가지들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를 대변한다. 하늘 속 구름마저도 소용돌이 치는 듯하다. 이 시기에 그려진 많은 그림들 대부분이 이런 곡선들의 향연으로 이뤄졌다. 그림 위에서 마치 춤을 추듯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오히려 평화로운 매력이 느껴진다. 그림 속 이 모든 것들이 우아하고 조화롭기까지 하다.










Portrait de l'artiste / Self-Portrait / 자화상

1889

Oil on canvas

H. 65; W. 54.5 cm


가난한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도 모델을 구할 비용이 없어 종종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동생 테오에 의존했던 빈 센트 반 고흐 또한, 자신 스스로가 모델이 되어 꽤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십년간 그린 자화상, 사십여점. 그는 그의 그림에서 사진작가 보다 더 닮은 것을 찾고 있었다. 그가 남긴 시간대 별 그의 자화상에는 당시 그의 심리 상태를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자화상의 눈 빛속에는 그의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녹여져 있다. 실제 고흐는 당시에 불안과 망상에 휩쌓여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 그림 앞에 서있노라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혹자들은 이 그림의 배경에서 환각성이 느껴진다고도 한다.








La chambre de Van Gogh à Arles / Van Gogh's Bedroom in Arles / 아를의 반고흐 침실

1889

Oil on canvas

H. 57.3; W. 74 cm


그의 그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고흐는 고흐의 방이라는 이름의 유사한 그림을 세 점이나 남겼다. 동일한 구도와 동일한 가구배치에 비슷한 색감으로 그려진 고흐의 방이라는 작품을 나는 바닥의 색으로 나름 구분한다. 제일 먼저 그려진 고흐의 방은 1988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네덜란드 암스데르담의 반고흐 미술관에 있다. 그 첫번째 고흐의 방에 그려진 바닥은 다른 두 점의 그림에 비해 노란빛이 돌며 좀 더 매트하다. 실제 그는 음영과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다. 단순함을 통해 휴식과 수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첫번째 고흐의 방 작품은 당시 홍수로 인해 일부가 손상되었고, 이듬해에 고흐는 유사한 그림 두 점을 추가로 그린다. 그의 말을 빌어 '반복' 이라고 표현한 작품은 현재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축소'라고 표현한 작품이 오르세에 소장되어 있는 바로 위의 그림이다. 실제 다른 두 점에 비해 조금 작은 사이즈로 그려졌다. 이 반 고흐의 방에서는 다른 두 점에 비해 좀 더 정돈된 느낌이 든다. 그림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액자 속 그림이 세 점마다 다르다는 것이 또 하나의 숨겨진 특징이다. 









Eugène Boch / 유진 보슈의 초상화

1888

Oil on canvas

H. 60; W. 45 cm


그가 남긴 초상화 중 가장 애정이 담겨 있는 초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 빛은 어딘지 모르게 고흐 그 자신과 닮아 있다. 벨기에 화가였던 유진 보슈를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에게 위대한 꿈을 꾸며, 나이팅게일 처럼 일하는 예술가 친구라고 하였다. 그의 머리 뒤로 보였던 초라한 아파트의 평범한 벽을 그리는 대신, 마치 우주 같은 무한한 공간을 표현하였다. 고흐는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푸른 빛을 그곳에 불어 넣었다. 유진 보슈가 입은 노란 재킷과 완연하게 대비되어 더 그림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고흐의 애정이 이 한 장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Fritillaires, couronne impériale dans un vase de cuivre / Imperial Fritillaries in a Copper Vase / 청동꽃병에 담긴 왕관초가 있는 정물

1887

Oil on canvas

H. 73.5; W. 60.5 cm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는 파리 몽마르트에 있던 두 해 동안 230점에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고흐는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주의 화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화풍이 변화하던 시기이다. 그의 동생 테오는 많은 이들이 형을 좋아하며, 매주 친구들이 형이 정물화에 쓸 예쁜 꽃들을 보내준다고 전했다. 또한 그림의 색채가 전보다 더 밝고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당시 고흐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라고 하는 연상의 이탈리아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일주일에 그림 서너 점을 그려주고 식당에서의 식사를 보장 받았다. 후에 그 식당 벽은 고흐의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는데, 대부분이 꽃 정물화였다고 전해지는 걸로 봐서는 당시 정물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 수 있다.











L'Italienne / The Italian Woman / 이탈리아 여자 

1887

Oil on canvas

H. 81; W. 60 cm


그림 속 여자는 다른 인상파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유추해 볼때, 앞서 언급했던 식당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화로 여겨진다. 실제 고흐는 이 여자와 몇 달간의 짧은 연애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림의 제목을 여타 다른 초상화와 다르게 직접적인 이름으로 짓지 않고 단순히 이탈리아 여자라고 명명한 것을 보면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 않았나 싶다. 당시 고흐는 일본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이 시기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비대칭적인 경계, 그림자도 원근감도 없는 인물 표현이나 단색 배경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동양적 미학과 닮아 있지만, 붉은 색과 짙은 녹색으로 표현한 여자의 모습은 고흐만의 강렬한 보색대비를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붉은 색과 녹색으로 인류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한다라는 그의 목적을 구체화 한 것으로 보고 있다.










Le restaurant de la Sirène à Asnières / The Restaurant de la Sirène at Asnières / 아니에르쉬르센의 레스토랑 드 라 시렌느 

1887

Oil on canvas

H. 54.5; W. 65.5 cm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에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서 휴가를 보낼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는 센느강 유역의 아니에르쉬르센이라 곳에서 동생 테오와 함께 머물며, 이 레스토랑을 그렸다. 확실히 위에 그린 그림들과 색감에서 차이가 난다. 흰 색 붓 터치를 많이 가미한 이 그림은 인상파 스타일에 가장 근접하다고 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서 고흐는 그 만의 스타일을 찾았던 걸로 보인다.












Dans le jardin du docteur Paul Gachet / 폴 가셰 박사의 정원

1890

Oil on canvas

H. 73,0 ; L. 52,0 cm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반 고흐가 그린 작품들은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나타내는데 더 치중되었다. 구불구불한 형태나 불안해 보이는 소용돌이 형태, 배배 꼬인 모습 등으로 나타난다. 작품 속 소재들의 견고한 형태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각 형태들은 주변의 것들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캔버스에 표현된 유동적인 사물들은 반 고흐의 붓 터치에 의해 두려움, 불안감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색채 면에서도 황토색, 보라색, 차가운 녹색, 푸른색이 주로 쓰였다. 소재 면에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많이 채택되었으며, 어둡고 음산한 하늘이 그려졌다.








Mademoiselle Gachet dans son jardin à Auvers sur Oise / 오베르 쉬르 우아즈 정원 안의 가셰 양

1890

Oil on canvas

H. 46,0 ; L. 55,5 cm


그는 태어나면서 부터 사랑을 갈구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같은 날에 사산한 첫 아이의 망령에 사로잡혔던 그의 어머니는 똑같은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준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철저히 대체된 아이로 자랐다. 죽은 형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만을 향한 사랑을 갈망했지만 말이다. 그후 그는 언제나 사랑에 외면 당했다. 런던의 하숙집 딸 유진, 미망인 사촌 케이, 미혼모였던 창녀 시엔, 열두살 연상의 마르호트, 감자먹는 사람들의 모델이었던 열일곱의 스틴, 그리고 마지막 폴 가셰의 딸 마르게리트까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는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속에 폴 가셰의 딸 마르게리트가 흰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는 웨딩드레스를 연상케하며, 그녀를 향한 고흐의 애정이 묻어난다. 이 시기에 고흐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던걸로 보인다. 그의 그림 색 톤에 평온함이 반영되었다. 










La nuit étoilée / Starry Night /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혹은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1888

Oil on canvas

H. 72.5; W. 92 cm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생전에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제목의 그림을 두 점 남겼다. 뉴욕현대미술관에 가면 그의 또 다른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두 작품을 구분 짓기 위해 오르세에 있는 그림을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혹은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고 불린다. 나중에 그려진 뉴욕현대미술관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밤 하늘이 소용돌이 치듯 곡선으로 휘감아치는데 반면, 이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좀더 정적이고 정돈된 차분한 느낌의 밤하늘이다. 그리고 두 남녀가 오른쪽 하단에 담겨져 있다. 신비로운 밤하늘과 별빛을 머금은 강가, 그리고 두 남녀. 나는 전체적으로 좀 더 따뜻하고 안정된 느낌의 이 그림이 뉴욕에 있는 그것 보다 더 좋다. 당시 고흐는 밤하늘을 표현하는 것에 강박적으로 몰두 했다고 한다. 그는 이 그림을 먼저 그리고 후에 정신 병원에서 두번째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렸다.









역시나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 앞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큰 벽에 작은 그림 한 점이 얼마나 영향력을 뿜어낼 수 있는지,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침을 실제 오르세 미술관 2층에 가서 느껴 보길.













어느덧 오후 세시! 아침부터 입장했던 오르세 미술관, 줄서느라 몇시간 날리고 실제 들어와서 고흐그림에만 몰두했던거 같다. 모네그림도 좀 보긴했지만, 그 모든 그림을 다 몰입해서 보는건 무리다.











기념품 샵에서도 고흐 위주로...










특이한 신호등과, 낙엽이 떨어져 있고, 작은 철길이 지나가던 여기는 어디일까?













고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두번째 장소,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Sur-Oise)


고흐가 생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작은 마을이다. 파리에서 북쪽 외곽에 위치해있고, 파리와는 전혀다른 프랑스의 소도시를 느껴 볼 수 있는 아기자기하고 조용하며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는 이곳에 두 달간 머무르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그림의 배경이 된 마을의 풍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재미가 있다. 당일치기의 아쉬운 여행이었지만 시간이 많았다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오래 머무르며 풍경들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Auberge Raboux / 라부여인숙


그림 같은 라부 여인숙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실제 이 여인숙 마지막 층에 고흐가 머물렀던 다락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라 방 안을 담지 못했다. 다락방 한쪽 벽면에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 곳은 고흐의 그림을 걸기 위해 비워둔 자리라고 한다. 그의 소원대로 방에 그의 그림을 걸어두고자 했지만 현재 그의 그림은 너무 고가의 작품이라 도네이션으로 그의 그림을 구입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 이라고 한다. 그의 그림이 벽에 걸린다면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술관이 될 것이다. 여길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다락방을 오르는 계단은 삐걱거렸으며, 천장은 다소 낮았던 것 같다. 방안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는데 볕이 들었지만 굉장히 비좁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북향인가?











과거를 재현한 전시가 하나 더 그곳에 있었다.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 계속 움직여 볼까.







이 마을의 재미있는 점이 마을 곳곳에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된 부분에 이런 안내 팻말이 있다.












그리고 그 부근의 바닥을 내려다 보면 빈센트라는 표식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베르의 길과 거리 혹은 오베르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현재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 박물관에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이된 바로 이 지점. 지금은 콘크리트 바닥이 깔려 버렸지만 위로 오르는 계단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오베르의 교회 그림은 바로 이곳에서 그려졌나보다.














내가 방문할 당시에는 누군가의 손길에 잘 정돈된 초록 풀밭이었던 곳. 그리고 고흐의 시간에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된 곳. 그리고 고흐가 이곳에서 폴가셰의 총을 빌려 생을 마감한 곳. 사실 고흐는 이곳에서 총을 맞았으나, 자살로 알려졌지만 타살의 의혹이 있다. 그리고 그는 사실 여기서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라부여인숙에 있는 그의 다락방까지 걸어 갔으며, 몇 일을 침대에 누워 치료를 거부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자살을 택했다면 애초에 그 다락방안에서 총구를 겨눴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이 밀밭에서 총구를 겨눈뒤 굳이 다락방까지 걸어가지도 않았겠지.














정말 작은 무덤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나란히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 3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고흐. 그의 동생 테오는 고흐가 죽고 일년 뒤에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 납작한 돌맹이에 해바라기를 그려 그의 무덤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갔더라고.














Parc Van gogh / 반 고흐 공원


고흐의 동상이 서있는 아담한 공원을 방문하는 것이 이날의 마지막 코스였다.







아살리아의 크리에이티브 유럽 프로젝트 4탄, 벨기프랑

To be Continued...




















에필로그




Vincent van Gogh / 빈센트 반 고흐


여기 가만히 서서 그를 올려다 봤는데, 깊은 눈 속에서 눈알이 움직인걸 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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